얼마 전 TV를 통해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판결 인용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며 계엄 이후 4개월 넘게 대한민국을 탄핵 찬성과 반대 집회로 들끓게 했던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던 함성소리는 이제 어느덧 잠잠해진 것 같아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시민들이 불법 계엄의 결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심지어 전국의 학교에서는 생중계로 재판 장면을 지켜보며 권선징악이라는 역사의 한 장면을 목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문득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과 유튜브를 보며 그의 삶과 인생을 톺아보던 중, 문형배 당시 학생에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4년 동안 장학금을 주며 후원을 해준 의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의인의 이름은 김장하 한의사입니다. 그는 기업인, 교육인, 시민활동가, 한의사로서 MBC 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다큐 영화 '어른 김장하'가 대통령 탄핵 선고 이후 화제가 된 가운데, 영화관에서 다시 관객들과 만납니다. '어른 김장하' 영화가 2025년 4월 10일 CGV에서 재개봉을 합니다. 이후에는 전국에 있는 독립영화관으로 확대 상영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글은 평생을 봉사와 사회활동으로 헌신하신 김장하 선생의 생애와 일화들을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1. 생애
김장하 선생은 1944년 1월 16일 경상남도 사천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며 잡일을 하고, 밤에는 한약업사 공부를 했습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963년 사천군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하였으며, 1972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약 50년 동안 운영하였으며, 2022년 5월 말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한약방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하여 얻은 수익을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사업을 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 온 독지가로, 1984년 100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로 10여 년간 학교의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 하였습니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형평운동 기념사업회와 진주 문화연구소는 본인이 직접 설립에 앞장섰으며,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진주지역 서점을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이 밖에도 진주에는 김장하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여러 곳에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 선생은 2021년 재단이 해산되자 당시에 해산되고 남은 기금 34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그는 2022년 5월 은퇴 후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사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습니다. 이제는 문을 닫은 남성당 한약방 건물은 진주시에서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25년 개관이 목표입니다.
2. 일화
앞서 언급한 문형배 헌법재판관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바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문형배 재판관은 2019년 본인의 인사청문회에서도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누구를 돕게 되어도 신문이나 언론에 보도자료는 절대로 내지 않으며, 무엇보다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 기자가 7년이 넘게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는데 그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습니다.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국가에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 김장하 선생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이어 왔지만 언론과의 인터뷰를 사양하고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예를 들면, 1995년 첫 민선 진주시장 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압도적으로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했는데,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으며, 주변 단체에서 경상남도 문화상이나 진주시 문화상, 경남 교육 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라며 극구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호 남성(南星)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김장하 선생은 '남성(=남두육성, 南斗六星)은 목숨(壽)을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평생 많은 기부를 했지만 돈을 빌려주는데도 나름의 원칙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나 선거자금은 절대 지원해주지 않으며, 개인적인 사업자금이나 경비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평등 사업과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오랫동안 후원을 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극우 세력의 색깔론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한 극우 성향의 사람이 김장하에게 전화를 걸어 빨갱이짓 하고 다니지 말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장면이 나오지만, 김장하 선생은 상대방이 비난을 하는데도 “나에 대해 잘 모르면 얘기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담담한 말투로 대응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습니다.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을 사용했으며, 해외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역시 6.25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평양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한 일화로,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 유세 중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장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연락도 없이 한약방을 찾아가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김장하 선생을 만나려고 사전 요청을 할 경우 무조건 거절한다는 걸 알아서 그냥 통보 없이 들어가서 만났다고 합니다. 김장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다른 손님들 대할 때처럼 믹스커피를 주며 환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당시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으나,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교사도 해고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025년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판결일에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판결 직후 김장하 선생에 대한 일화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어린 시절 학생 문형배를 도와준 김장하 선생에 대한 그의 추억과 미담이 재조명되기도 하였습니다. 탄핵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던 2024년 연말에도 문형배 재판관은 김장하 선생에게 짧게 안부 전화를 했는데, 선생께서는 ''단디 해라"라는 간단한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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