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이 김시습에게 '위천조어도'라는 낚시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글을 부탁하니 김시습이 시를 적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글에서 김시습은 단종의 자리를 빼앗은 수양대군과 무리들을 꾸짖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사건,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을 맞수로 삼아 두고두고 기억하게 만든 사건이 바로 권력을 둘러싸고 조카(단종)의 자리를 빼앗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그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거정은 공신 반열에 올라 탄탄대로의 정치인생을 살았으며, 김시습은 시대와 체제에 반대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하며 평생 전국의 산사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두 사람, '사가정' 서거정과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시대 초기의 뛰어난 문인이자 학자로, 조선의 문학과 사상,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성향과 배경을 가졌으나 공통적으로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교 이념과 철학, 불교 이념,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시대의 격랑이 만들어 낸 어긋난 두 사람의 삶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서거정의 삶 : 공명을 선택하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거정의 어머니는 권근의 딸입니다. 즉,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자입니다. 서거정의 그의 집안은 학문과 문예에 뛰어난 전통을 가졌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서거정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와 학식을 보였습니다. 특히, 시에 능하였습니다. 1438년 세종 20년 생원, 진사 두 개의 시험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예종, 성종 대에 걸쳐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정리하고 국가의 문물제도를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487년 왕세자의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의하였으며,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23년간 문헌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수많은 인재들을 선출하였습니다.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어 공동으로 집필한 것으로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 '연주시격언해' 가 있으며 개신 저술로서는 '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문' 등의 편찬에 참여하여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드러내면서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것이었습니다. 서거정이 주동하여 편찬한 사서, 지리지, 문학서 등은 대개 왕명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관직 생활 후반에는 성종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학문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고,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2. 김시습의 삶 : 절의를 선택하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전기의 문인, 철학자, 사상가로, 한양의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습니다. 5살 때 신동이라는 소문이 나자,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 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합니다. 15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인간의 무상함을 깨달아 18세에 송광사에서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습니다. 계유정난(1453)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이에 크게 실망하여 세속을 떠나 철원에 은거하면서 '자규사'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이후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절을 떠나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푸른 풀밭 위에는 누렁이 잠자고, 높은 절벽에서는 흰 잔나비 우짖는다. 십 년 동안 이리저리 다녔건만 갈림길만 만나면 애를 태운다.” 위의 글은 절의와 공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을 읊은 글입니다. 결국 그는 절의를 선택하며 '후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사육신의 시신을 담아 노량진에 임시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합니다. 21세부터 30세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을 지었습니다.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서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였습니다. 이때 매월당이라는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에 남겼습니다. '금오신화'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비판,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관직 생활보다는 자유로운 방랑을 택한 그는 조선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두루 탐구했습니다. 김시습은 숨어 지내거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관직이라는 속박을 벗어나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고자 애썼으며, 그의 사상은 조선 전기의 유교적 가치관을 넘어서는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이에 이이는 김시습을 가리켜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김시습, 이맹전, 조여, 원호, 성담수, 남효온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3. 서거정과 김시습 : 시대의 격랑에 빠지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전혀 다른 길을 걸었으나, 조선 초기 사상과 문학에 각자의 자리에서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서로 연배의 차이(15살)는 있지만, 둘 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놀라게 할 신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가 하면, 실제로 당대 최고의 스승인 이계전의 문하에서 동문수학까지 했던 사이입니다. 이계전은 조선 초기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자랑했던 이색의 손자이자, 권근의 외손자이면서 대제학까지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서거정과 이계전은 이종사촌 간입니다. 서거정은 체제 내에서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 조선이라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김시습은 체제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사상과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어 그러한 감정을 시와 소설로 담아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 모두 학문과 문학을 통해 조선 초기 문예 부흥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서거정의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적 성향과, 김시습의 비판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은 조선 전기 문학의 두 축을 형성하며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사람의 사상적 차이는 조선시대 한문학의 다양성과 독창성에 한층 더 깊은 울림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서거정과 김시습의 작품과 사상은 조선 전기 사상, 문학, 철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서거정의 저술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강화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김시습의 작품들은 인간의 욕망, 자연의 영속성을 탐구했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조선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서거정과 김시습의 삶과 작품은 조선 전기 문학과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후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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