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권근은 다 같이 고려의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이 오른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 모두 훌륭항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명에 죽었고 정도전은 살해당하고 집안도 멸망하였다.' 이 글은 허균이 정도전과 권근을 비교하면서 쓴 글 중 한 부분입니다.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허균에 의해 이 둘을 비교하는 글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두 사람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듯합니다. 두 사람 모두 이색 문하에서 공부했고, 비슷한 시기에 고려 왕조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모순된 현실에 대항하여 개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이 둘은 벼슬길에 나아가 상당한 지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정도전은 제명대로 살지 못하였으며, 권근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삶과 죽음에는 각자가 살아온 내력과 사상적 태도가 그대로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글은 이 두 사람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1. 허균의 '정도전,권근론'
허균은 '정도전, 권근론'에서 권근에 대해 조선의 유학적 이념과 학문적 기틀을 세운 학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권근의 학문적 깊이와 성리학적 사유의 정수를 강조하며, 특히 '입학도설', '동국사략' 등을 통해 조선의 교육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을 체계화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허균은 권근이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발전과 교육 제도 정립에 기여했음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조선 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하였습니다. 허균은 권근의 보수적인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그의 학문적 성취와 교육적 영향력은 인정하였습니다. 허균은 정도전을 조선의 건국이념과 국가 체제를 설계한 혁신적 인물로 평가하였습니다. 허균은 정도전의 정치적 비전과 유교적 국가 이념의 정립에 주목하며,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 등을 통해 조선의 국가 기틀을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정도전은 급진적 개혁 정신과 불교 비판,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구축을 강조하였습니다. 허균은 정도전의 사상이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점을 지적했으나, 조선 왕조의 정치적, 이념적 기초를 다진 공로를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2. 권근의 생애와 활동
권근(權近, 1352~1409)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안동입니다.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입니다. 고려 말 사회의 혼란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격변기를 살았으며, 성리학의 발전과 조선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권근은 고려 말기에 성리학에 심취하여 학문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고려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학문과 교육에 매진하였습니다. 특히,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교류하며 성리학을 심화시켰습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개국 과정에서 정도전과 다른 입장을 보였으나, 조선이 건국된 후 새 왕조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태조, 정종, 태종의 세 왕을 섬기며 교육제도와 학문정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중 '입학도설'은 유학의 입문서로, 성리학적 사고를 쉽게 풀어낸 교육서입니다. '동국사략'은 우리나라 역사와 유교적 이념을 결합해 서술한 역사서로, 조선의 정통성과 유교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3. 정도전의 생애와 활동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정치가, 유학자입니다. 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입니다. 고려 말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또한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에 정도전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사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과거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유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성계와 뜻을 함께하여 위화도 회군을 이끌고 고려 왕조를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후에 조선 건국하고,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제도와 법률, 사상을 설계하였습니다. 특히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 등의 저서를 통해 조선이 유교적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 초석을 다졌습니다. 조선의 정치 철학과 제도를 만들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통치 이념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전으로,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불씨잡변'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유학적 가치를 강조한 책입니다. 이러한 정도전의 저서들은 조선 초기에 조선이 정치적, 사상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4. 맞수의 탄생
정도전과 권근은 언제나 같은 영역의 일을 두고 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악장을 짓고 법전을 손질함으로써 예악과 제도를 정비하고, 조선의 이념적 방향을 결정하는 성과를 내놓으며, 불교를 이념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새로 건국된 조선의 유교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등의 엄청난 일을 모두 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격차는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왕의 자질로서 문과 무를 다 중시하지만, 권근은 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통치자의 덕목을 나열함에 있어 문과 무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정도전은 통치자를 영웅화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예컨대, 이성계는 전장에서는 용맹을 떨치고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춘 인물이며, 또한 덕을 갖춘 성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그의 역할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열정과 개혁적인 태도를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죽음은 이미 내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권근은 제도와 사상이 이미 갖추어진 상태에서 정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건국과정에서 해야 할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권근의 역할은 안정적으로 조선을 이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건국이 마무리되고 수성의 단계로 이어지는 시기에, 강력한 무력을 강조하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권근은 이제 국가의 위엄을 장엄하게 세울 수 있는 안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두 사람이 개혁의 물꼬를 트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지만, 서로 다른 행보를 걷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비극이 권근이라는 인물을 역사의 전면으로 내세우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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